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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사랑스럽게
에덴지기  2016-01-10 07:44:46, 조회 : 681, 추천 : 59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누가복음 2:41~52                 2016. 1. 10 (주일 낮 예배)

벌써 1월 둘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세월은 우리가 보고 있든 안 보고 있든, 의식을 하든 안 하든 계속 흘러갑니다. 아기가 자라서 어느 새 학교에 가고, 금방 대학 가고, 결혼하고, 엄마 아빠 됩니다. 며칠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왔는데 자기 할아버지 됐다고 얼마나 자랑하는지 몰라요. ‘그럼 나도 이제 할아버지 될 날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인가?’ 정말 실감이 안 나는 이야기입니다. 실감이 나든 안 나든 세월은 사정없이 흐르고 결국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없다 시리즈’라는 재밌는 글이 있어요.
10대에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힘이 없다. 100세에는 뭐가 없을까요? 다 필요 없다.
지금이 연초라서 그런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삶의 자세’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20대는 금방 30대가 되고, 30대는 금방 40대가 되는데, 무엇보다 나이에 걸맞게 성장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과 인사할까요? [올해도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52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아멘. 예수님도 키가 자라면서 지혜가 함께 자랐고 점점 더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바라는 바지요.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녀들이 세월이 감에 따라 지혜로워질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고 우리도 그렇게 본받기를 원합니다.

󰊱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41~42절 함께 봉독하지요.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아멘. 언제 예루살렘에 갔다고요? 유월절.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할 때 애굽 왕 바로가 그냥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준 게 아니지요.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항복을 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뭐였지요? 각 가정마다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다 죽는데 이스라엘 사람의 장자는 안 죽었지요. 어떻게요? 하나님 말씀대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어요. 죽음의 천사가 각 가정마다 장자를 다 죽이는데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는 집은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갔어요. 그래서 넘을 유(踰), 넘을 월(越) 유월절이에요. 유월절이 영어로는 Passover인데 역시 넘어갔다는 뜻이지요. 유월절은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일제에서 해방된 광복절과도 같은 날이고, 교회 절기로 보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된 부활절에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신명기 16: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그러니까 유월절과 맥추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어요. 마리아와 요셉은 신실한 하나님이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큰 아들 예수가 열두 살이 되자 아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간 거지요.
우리도 요즘 성경통독 특별새벽기도회와 낮 성회를 하는데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 자녀가 있으면 방학이니까 새벽이나 낮 성회에 함께 와도 좋을 거 같아요. 자녀들이 부모님과 함께 새벽기도 했던 경험들, 함께 성경을 읽었던 경험들이 분명히 아주 귀중한 신앙유산이 될 줄 믿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열두 살 된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작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님을 잃어버린 거죠. 친구들과 어울려서 가고 있겠거니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부모가 얼마나 놀랬겠어요? 가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아들을 찾아 헤맸겠지요. 그런데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 돌아와 보니 거기 있는 거예요. 선생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는데 얼마나 대답을 잘하는지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너 왜 여기 있었니? 엄마 아빠가 너 찾아 헤매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랬더니 참 놀랄만한 대답을 합니다. 49절 함께 봉독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멘.
예수님은 열두살 어린 나이에도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체성이 뭐지요? (정체)성 ‘Identity’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내 이름은 김말숙이고, 강화에 살고, 개똥이 엄마고, 직업이 뭐고.... 나를 설명하는 말이 대개 그런 거죠.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주변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거 말고, 특별히 하나님과 관련해서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겁니다.

군대 가는 청년들 보세요. 어제까지만 해도 밤늦게까지 TV 보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자고, 아침에는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고 그러던 사람이 군대 가면 확 달라지지요. 밤 열 시 되면 딱 자고, 아침 6시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고, 그 힘든 훈련도 다 받아냅니다. 왜요? “나는 이제 군인이다.” 하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훈련을 마치면 진짜 변화된, 실력을 갖춘 군인이 되는 거지요. 그때쯤 되면 군복을 벗어도 눈이 반짝반짝한 게 군인 티가 납니다. 민간인하고 구별되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교회 나오기 시작할 때는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미 성도입니다. 소속이 달라지고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에 속해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어둠의 자식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달라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군인에게는 “나는 군인이다.”하는 정체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하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없으면 10년을 믿어도 성장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면 성장과 변화가 금방 일어납니다.


하드리아누스라는 로마 황제가 있었습니다. 주후 117년부터 138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했던 왕입니다. 그가 군인이었을 때 항상 그를 괴롭히던 동료가 있었습니다. 늘 서로 대적하는 사이였는데,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그를 괴롭히던 동료는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그를 불렀습니다. 그는 벌벌 떨며 사색이 되어 황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황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까이 오게. 두려워할 것 없네. 나는 로마 황제야.....” 내가 세계를 다스리는 로마 황제인데 옛날의 자잘한 일을 가지고 복수하겠느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정말 황제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래 뵈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다 지나간 옛날 일에 연연하며 원한을 품고 미워하겠느냐?”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까짓 돈 몇 푼에 거짓말을 하거나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투겠냐?” 이런 하나님의 자녀다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때문에 형제간에도 고소를 합니다. 좀 더 가지겠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데 멋지게 폼 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봅시다.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제가 이래 뵈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멘.

󰊲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아야 합니다.
밥이 밥그릇에 잘 담겨있으면 보기도 좋고 먹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지만, 똑같은 밥이라도 볼에 턱 붙어 있으면 보기가 안 좋습니다. 싱크대나 어디에 떨어져 있으면 영 보기가 흉합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듯이 우리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임원 임명을 했는데, 권사는 권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고, 집사는 집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자리, 봉사하는 자리,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면 목사가 보기에도 힘이 빠지고 걱정이 됩니다. 이 분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분인데 왜 없을까? 무슨 일이 났나? 염려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어요. 권사 집사 뿐 아니라 교사는 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성가대는 성가대의 자리에, 찬양팀은 찬양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리요, 그 자리가 하나님이 복 주시는 자리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봉독할까요? 49절 봉독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멘. 열두 살 때 하신 말씀이니까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도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시편 128:5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그랬어요. 어디서 복을 주신다고요?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시온이 어딥니까? 시온 산, 시온 성. 시온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이 말씀을 벌써 아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내가 내 아버지의 집, 즉 하나님의 (성전)에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합니까?” 말씀하신 거죠.

하나님의 성전은 물론 이 건물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곳, 하나님이 계시는 그 모든 곳을 다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요? 안 계신 곳이 없지요. 그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그냥 아무데나 있어도 다 하나님의 성전이네요? 맞아요. 그런데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아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할 때도 말씀드렸는데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지금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코람 데오”라고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이 사실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 어디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고, 어디서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가장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지혜롭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했고, 둘째는 (부모님)께 순종하였습니다. 49절만 읽으면 좀 부모님께 무정하게 말한 것은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51절을 보면 알게 됩니다. 51절 봉독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아멘.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고 성전에서 산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모님을 잘 받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부모님께도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인정받게 됩니다.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받기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고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34.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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