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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에덴지기  2016-01-24 20:52:19, 조회 : 709, 추천 : 59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누가복음 3;21~22, 38                    2016. 1. 24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에서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공생애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적인 삶,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는 겁니다.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바로 요단강에서 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양이 좀 이상하지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맞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 없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 즉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면 ‘겸손하게 살아야지’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낮아집니다. 그런데 참으로 민망한 것은 내가 낮아진 바로 그 순간에 ‘이래 뵈도 내가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야.’ 하는 생각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할 때 사람들이 “권사님은 어쩜 이렇게 겸손하세요?” 이런 말을 하면 “아유,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반대로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 졌을 때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취급하면 슬그머니 마음속에 ‘아니, 내가 이거 밖에 안 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하면서 은근히 기분이 안 좋아져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아직은 진정으로 겸손하지 못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낮아지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만해도 엄청나게 낮아지신 거지요. 그런데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는 건 더 말할 수 없이 낮아지는 거지요. 세례는 죄가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거잖아요. 그래서 3:3에도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까 회개도 세례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죄가 있는 사람처럼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뭘까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고 낮아지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없이 낮아지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바로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세례의 의미가 바로 자아의 죽음이잖아요? 세례를 베풀 때 물을 머리에 바르는 이유는 물이 머리까지 찼다는 말입니다. 물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면 어떻게 되지요? 죽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 받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됩니다. 내 자아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낮아지되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진정한 겸손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세례요한도 겸손의 본을 보여줍니다. 얼핏 보기에는 세례 요한이 교만하고 어이없어 보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세례를 주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세례요한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이미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겠다고 하실 때 마태복음 3:14절에 보면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고 예수님을 말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베풀기를 허락하라.” 하시니 그대로 순종하여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이게 겸손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불순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이번에 부흥회를 하는데 준비팀으로 섬겨주세요.” 혹은 “올해 선교회장을 맡아주세요.” 이러면, 우리교회야 그런 분이 안 계시지만 다른 교회에 보면 “전 능력이 없어서 못해요. 저보다 능력 있는 아무개가 하면 좋겠어요.” 그런 분들이 많아요. 능력이 없다고, 여건이 안 된다고 하면서 사양하는 게 겸손한 게 아니라, 능력이 없고 할 여건이 안 되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내 생각 다 내려놓고 순종하는 게 겸손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능력이 없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주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역사하셔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좋은 열매가 맺혀요. 여러분, 세례요한과 같이 내 생각 내려놓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첫째,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무엇을 하셨지요? 기도하셨습니다. ➁ (기도)함으로
여러분, 예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만일 하나님께 뭐 해달라고 하는 게 기도라면 예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미 예수님은 못하는 게 없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기도는 단지 하나님께 뭘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대화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거예요. 기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 하게 되니까 점점 더 하나가 되는 거죠.
연애해 본 사람은 알지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매일 뭐 해달라고만 하고 사달라고만 하면 그 관계 얼마 못 갑니다. 그런데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점점 깊이 알아가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고, 하나가 되면, 뭐가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어요. 아무것도 없어도 둘이 함께 뭘 하든지 행복하고 좋잖아요. 사람끼리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어 늘 함께하는 관계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겠어요.
그런데 바로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해요. 예수님도 사역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하루를 시작할 때, 혹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늘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기도했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면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바로 성령이 임하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성령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있고, 하나님 뜻대로 구하면 구하는 것마다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 천 배 만 배 더 좋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절대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내가 그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고사하고 성령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온전히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강림하시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우리 22절 다시 한 번 봉독하겠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이 예수님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뿐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는 겁니다. “OO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내가 너를 기뻐한단다.” “OO아, 너는 내 딸이야. 내가 너 때문에 너무나 기쁘단다.”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와요. 차이점이 뭐지요?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하면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와요.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아버지는 요셉이요, 그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닷이요... 하면서 위로 올라가요. 어디까지 올라가죠? 아브라함까지? 아니오. 아브라함을 넘어서 노아를 넘어서 아담까지. 아담으로 끝나나요? 아니지요. 38절 함께 봉독합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어디서 끝나요? 하나님. 누구의 족보가요? 예수님의 족보. 여러분의 족보는요? “내 위는 아버지요, 그 위는 할아버지요....” 쭉 올라가다 보면 어디까지 가요? (단군? 그럼, 그 위는 곰이요? 아니지요.) 아마 우리는 거의 다 셈에서 만날 거예요. 셈이 누구예요? 노아의 아들. 노아의 홍수 때 다 죽고 노아의 가족만 살았는데 세 아들 중 셈이 아시아계의 조상일 가능성이 많아요. 결국 우리도 올라가다 보면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값 주고 다시 사신 아들이에요.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정말 더 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만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우리 대신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만큼 우리를 예수님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사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이런 나를 정말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니까. 죄 지을 때도 있고, 정말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지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 그렇다 쳐도, 정말 우리를 기뻐하기까지 하실까요?  우리도 자녀들을 사랑하잖아요. 그녀석이 잘해도 사랑하고, 잘 못해도 사랑해요. 잘할 때는 기뻐하면서 사랑하지만, 잘 못할 때는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사랑하지요. 하지만 잘 못하는 녀석을 보면서 기뻐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대요. 무슨 조건이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이 스바냐 3:17절 말씀인데요. 저는 그 말씀이 그렇게 좋으면서도 머리가 나빠서 잘 외우지도 못해요. 그런데도 그렇게 좋아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아멘.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나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거예요. 야! 이것처럼 좋은 말씀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 옆에 있는 분께 얘기해 드립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뭘 잘해서 기뻐하시는 게 아니에요. 스바냐서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 안 듣다가 나라는 빼앗기고 코가 석자가 되어서 두 팔을 늘어뜨리고 힘이 다 빠져 있는데, 하나님이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아멘?

➀ 하나님은 우리가 뭘 잘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기뻐하십니다. 아기들을 보면 아기들이 뭘 잘해서 부모가 기뻐하는 게 아니지요. 그냥 그 아기가 있다는 것 자체로, 그 아기가 내 아기라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나는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단다.” 와!
‘그래도 그렇지. 처음 믿을 때야 좀 부족하고 잘못하고 그래도 이해해 주시겠지만 이제 벌써 믿은 지 10년 20년이 넘고, 직분이 집사 권사 장로 혹은 목사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난 잘 못하는 거 같아.’ 이런 생각이 들어서 낙심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부족하고 잘 못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 아십니까? 부모 되신 여러분, 자식이 승승장구하고 잘 나갈 때는 사랑스럽지만 사업이 망하고 어려워지면 안 사랑스럽습니까? 오히려 더 사랑하고 더 기도해주게 되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그러실 거예요. “승철아, 나는 네가 열심히 하고 잘 할 때는 물론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낙심하고 힘들고 넘어졌을 때는 너를 더욱 사랑한단다.”  

➁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지금은 좀 부족하지만 미래에 달라질 모습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거든요. 지금은 직분도 잘 감당 못하고 쉽게 넘어지지만 앞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동역할 그 늠름한 모습을 하나님은 이미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전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교제하며 살아갈 그 모습을 바라보시니까 기뻐하시는 겁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너는 내 곁에서 영원토록 나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갈 내 자녀란다.” 하시면서 기뻐하시는 거지요.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 가운데 점점 더 힘차게 주님과 동역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놀라운 미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도 사랑을 고백하며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할 때 더욱 사랑해 주시고 손잡아 일으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겸손함으로 주님께 순종하고, 늘 기도함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힘들고 지쳐 (너는 내 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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